도시가 기뻐할 때 (1)

도시가 기뻐할 때 (1)

도시가 기뻐할 때 (1)

성에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8:8

많은 도시들은 오늘날 슬픔이 가득한 곳들이다.  시민들이 즐겨하는 아름다운 도시들이 있고, 건축, 역사적 구조물, 정원, 음악 그리고 예술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즐겨하는 곳들이 있지만, 다른 성향을 보여주는 도시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즉, 가난, 폭력 그리고 다른 심각한 현실들이 있는 황무지와 같은 도시들이 있다.  공해와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가 쌓이면서 이 세상의 거대한 많은 도시들을 성가시게 하고 있다. 도시에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외로움 속에 고통받고 있다.  넘치고 심오한 기쁨이 있는 그런 매우 행복한 도시를 찾는 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성경속의 기쁨이 넘치는 도시들

여러번 성경은 즐거워하는 도시에 대해서 말한다.  사무엘하 6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주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큰 기쁨을 가지고 도시를 즐거워하며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읽게된다.  느헤미야 8장에서 우리는 에스라가 바벨론 유배로부터 돌아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명하였을 때, 처음에 사람들이 울었다 (느헤미아 8:9)라는 것을 읽게된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한 날이며, 그들이 울거나 슬퍼하지 않아야 함을 듣게 되었을때, 그들은 “크게 즐거워하고” (느헤미야 8:12), 그리고 “크게 기뻐하였다” (느헤미야 8:17).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을 죽이려는 하만의 계획이 드러나고 뒤집히게 된 후, 그리고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왕국에서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왔을때,  우리는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였다는 것을 읽게 된다.  이 기쁨은 축제를 포함하였고, 사람들은 흥분해하며 서로 이야기 하고, 그리고 기쁨의 눈물조차 흘리고 있었다.  파괴의 검은 폭풍이 방지되었다.  죄와 악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이제 페르시아의 왕실에는 금관을 쓴 하나님의 백성의 친구이며, 그들의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분명 이것은 그들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들은 그들과 같이 기뻐할 이유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걱정하고 슬퍼해야할 이유가 많은 것이 사실이며, 더욱 확실하게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과 우리의 죄를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우리는 슬퍼해야할 이유를 찾기위해서 세상을 찾아볼 필요가 없다. 우리가 교회의 깨어짐, 냉랭함, 타협의 정신 등등을 생각해 볼때 슬퍼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때, 우리는 시편기자와 말한, “우리에게는 노래가 아닌 탄식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그분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사마리아인들이 사도행전 8장을 통해서 사마리아가 경험한 것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도 또한 도시에서 기쁨을 알게될 수 있다. 

사마리아가 기뻐하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을 발견하게되는데, 유대인의 도시가 아닌 바로 사마리아이다.  이 도시는 당연히 무시당하는 곳이며, 그 주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이 무시당하는 도시에 이르게 되었고 대부분의 선택받은 사람들은 발을 들여 놓기를 꺼려하는 곳이다.  우리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8:8)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읽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의 도시에서 이 기쁨을 일으키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도시 밖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들 중 한명은, 집사였고 (사도행전 6장 5절), 또한 전도자로 불려진 (21장 8절), 또한 예언을 했던 네 딸들로 알려진 빌립이 사마리아로 오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왔고, 특히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알려주었고, 그들에게 전해진 말을 들었다 (6장 5절).  기적이 빌립의 설교를 동반하였는데, 즉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고, 사탄이 쫓겨났다.  말씀이 능력으로 임하였고 사람들의 관심과 충성을 요구하였고, 효과들이 나타났다.  죽음과 사탄의 능력이 물러갔고, 그 자리에 기쁨이 찾아왔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쁨이 찾아왔다.  우리의 마음속에 참된 기쁨을 경험하였을 때,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었으나, 그런 기쁨이 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아니하고 공동체 전체에 기쁨이 배가되었을때 그것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자비가 가져다 주는 기쁨에 대한 몇가지 교훈들을 배워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 

  1.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박해와 어려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사마리아 성 (도시)안에 있었던 이 기쁨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고요한 때가 아니었다.  스데반은 막 순교를 당한 직후였다 (사도행전 7장). 저녁 늑대와 같이, 다소의 사울은 피의 맛을 막 보았고, 더욱 학살에 대한 열망을 그에게 불어넣어주었다.  핍박은 계속 많아지고 있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하신 것처럼, 시련은 기쁨이 없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기뻐하고”라고 말씀하셨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리라” (마태복음 5장 12절).  아기가 태어날 때, 어려운 해산 후에 기쁨이 찾아오는 것 처럼, 또한 핍박과 고난은 기쁨이 우리에게 오는 방법 수도 있다. 

서구세계에서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만일, 주께서 핍박을 가져오기로 결정하신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게 할 수는 없다.  사실, 하나님께서 핍박의 날개를 통해서 우리에게 깊은 기쁨을 가져오실 수도 있다. 세계 곳곳에서 핍박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우리 보다 더 많은 기쁨을 경험하고 있음이 마땅하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을 때, 고난은 이 세상에서 더 적은 기쁨을 찾도록 도와주도록 쓰임을 받을 수 있고, 주님과 복음을 통해서 더 많은 기쁨을 찾도록 해 줄 수 있다. 

2.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을 통해서 믿음으로 반응할 때 찾아온다.

사마리아 성에 기쁨이 찾아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기 위해서 바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오게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매우 싫어했던 것이다.  물론, 오래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말씀을 가져오셨다 (요한복음 4장).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의 기쁨을 맛보았고 다른 이들에게 그것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식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를 통해서 사마리에와 땅 끝까지 전해질 필요가 있었다 (사도행전 1장 8절).  그리스도 자신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사마리아를 언급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초막절기 축제의 마지막에 “심캇 토라” (말씀을 즐거워하기)라고 불리는 것을 기념하고 축하한다.  랍비들과 회중들은 말씀 두루마기를 들고서 기쁨으로 춤을 춘다.  비록 우리는 이와 같이 예식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기쁨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1절).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대함으로서 이 기쁨을 일으킬 수는 없다.  말씀에 대한 참된 기쁨은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서 계시하셨고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는 그 진리를 붙들고 있는 참된 믿음으로부터로만 흘러나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자신이 말씀으로 옷을 입고 있으시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분을 붙들때, 그 말씀이 우리의 가슴 속에 참된 기쁨을 흘러들어오게 하신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  그런 기쁨이 한 명 혹은 두명에게 오지 않고, 그 말씀이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 그리고 여기 사마리아에서 나타난 것처럼,  공동체 전체에 내려질 때, 이는 얼마나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3.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참된 회심의 열매이다.  

우리가 회심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들은 기쁨 보다는 슬픔을 생각할런진 모른다.  회심은 우리가 우리 죄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는 슬픔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3주일 89문답).  그러나, 참된 회심은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모든 종류의 선을 행하는 삶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90문답).  사마리아의 기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전의 삶과는 결별하며,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 드린 죄사로 죄용서를 받았다.  그들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었다 (로마서 5장 1절-3절).  복음은 진정으로 그들이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였다. (시편 51편 8절).  죄는 슬픔을 가져오지만 회심은 기쁨을 가져다 준다. 

참된 회심은 하나님께로 돌이킨 죄인의 가슴 속에서 기쁨을 만들어 주지만, 또한 그것을 목격한 다른 신자들을 즐거워하게 만들어 준다.  바울은 고린도의 사람들이 회개하였을때 기뻐하였다 (고린도 후서 7장 9절;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을 보라). 탕자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 15장 32절). 이 기쁨은 신자들에게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있게 된다 (누가복음 15장 10절).  하늘의 기쁨은 사마리아에서 반복되었고, 그 성이 기뻐하였던 것처럼, 죄인들이 회개하는 어느곳에나 그런 기쁨이 있다. 

다음 호에서, 우리는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의 영적이고 실제적인 측면들을 살펴볼 것이다.  오늘날 와글거리는 도시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되도록 우리가 많은 기도를 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