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은혜의 방편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

우리 회중들 속에서 종종 반복되는 말들이 있다:  “은혜의 방편”이 그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왜 은혜의 방편이 중요한가?

일반적인 것이며, 새로운 것이 아닌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는 많은 이들이 그들의 견해에서는 본질적으로 퀘이커들처럼 되었다.  즉, 그들은 교회의 생활 속에서 새롭고, 평범하지 않으며 신비한 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회중들이 ‘특별한’ 찬양, ‘특별한’ 간증과 ‘특별한’ 설교자들과 ‘특별한’기도로 지지하는 ‘특별한’ 집회를 가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회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이기 보다는 더욱 신비적이며 획기적인 것들의 힘을 믿는다.

대조적으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들은 대요리문답에서 “모든 [그리스도의] 규례들; 특별히 말씀, 성례, 그리고 기도” (대요리문답 154).  다른 말로 말하면, 은혜의 방편은 예배의 부분인데 제 2계명을 따라 매 주일마다 우리 회중들 가운데서 실행되고 있다.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은 더 많은 어떤 것들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주일에 그리고 주중에 “일반적인” 방편을 허락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특별히 영향을 주는 일반적인 방편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  이는 아마도 그들 자신의 삶 속에 거의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기에 공예배를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는 결과를 낳게 된다.   먼저, 예배의 장소는 “청중”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위한 편안한 장소로 바뀐다.  예배는 청중이 분명히 편안하게 되도록 바뀔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즐거워한다.  바람직한 결과는 진정한 영적인 회심이 아니라 교회의 계급 체계로 보충되는 것이다.  목적은, 그 모든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주장과는 별개로, 사람들을 다시 데려오는 것이지 구원이 아니다.  교회의 활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조금씩 덜 집중하게 되고 그 사역을 정당화하는 것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그것의 ‘합법성’은 그것의 사회적 활동으로부터, 그것의 지역 사회 활동과 그것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으로부터 오게 되며 이것들은 또한 일반적 은혜의 방편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띠게 된다.

또한 문제제기 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을 띠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즉, 상황은 바뀌었고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이라는 반복되는 주문이다.  이것은 완전히 겉으로만 그럴싸한 것이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1887년에 침례교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유명한 ‘격하시키는 논쟁”은 이러한 종류의 생각의 결과였음을 알고있다. 이 논쟁의 악한 결과는 스펄전이 경고하였듯이 국교회 밖에 있는 자들 중에서 복음의 신념들을 다시 바꾸는 것이었다. 

평범한 것이 비범하다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이 그 사용에 있어서 ‘일반적’인 반면 우리는 그것들이 그 효과에 있어서 일반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그 적절한 사용의 결과는 비범하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을 지정하셨는데 그것들을 사용했을 때 가져오는 놀라운 효과들에 대한 찬양을 하나님께만 돌아가게 하기위함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7절).  그가 말하기를 단순히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 아무것도 이룰수 없다고 말한다. 죄인들의 회심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방편들은 계속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방편들 그 자체는 일반적이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비범하다.  즉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다.  대요리문답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의 혜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요리문답 153), 그리고 실제적으로, “믿음의 은혜, 즉 택자가 자신의 영혼들을 구원하기까지 믿도록 만들어 지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1항).  독자들은 이런 진술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믿음과 구원에 관하여 ‘일반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대의 전도 운동은 점점더 적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있으면서,  그 문제는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에 있다고 추측한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들을 해야만 한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 추측들은 세속적인 것을 드러내주며 영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바뀌지 않았으며, 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사용해야할 방편도 또한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메세지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방법이 바뀔 필요가 있다가 주장한다.  그둘다 옳지 않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불신과 교회 내에서 은혜의 일반적 방편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다.

“하나님께서 일반적 은혜의 방편으로 그리고 그 방편들 아래에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먼저 그 방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시지 않은채로 그리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도록 하지 않고서는 은혜를 주시지는 않기때문에, 그것들을 일반적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들 자체적으로는 은혜를 일으키지 않기때문에 내적이고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없이 그리고 그것들은 동반하지 않는한 그것들은 성령의 역사와 분별되며, 그러므로 외적인 은혜의 방편으로 표현된다.”  토마스 리들리 (“신학요체” 중에서- 대요리문답에 관한 강독의 요지- 154문답을 설명하면서).

일반적인 방편만이 다음과 같은 것들에 유익하다.

로마카톨릭교과 개혁주의 신앙 사이의 차이점은 여기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로마카톨릭교는 은혜를 받는자 쪽에서 삶의 거룩함과 믿음과는 상관없이 성찬을 통해서 내려지는 ‘요체’로 본다.  대조적으로, 소요리문답은 “구속의 유익”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외적이고 일반적인 방편”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말한다 (소요리문답 88번). 이러한 유익들은 무엇인가?

  1. 구원

모든 하나님이 제정하신 예식 중에서, “특별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는 구원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유효하게 된다.  “특별히”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 사용하신다 (대요리문답 154, 155).

  • 성장

은혜의 똑같은 방편은 또한 이미 믿는 자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사용하신다.  구원하는 믿음, 즉, 일반적으로 (성찬이 아닌) “말씀의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말씀, 성례 그리고 기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장 1조)에 의해서 “성장하고 강하게” 되어진다.

  • 지식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앎에서 진보하게 되는가? 우리의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가 다같이 명백하지 않으며, 또한 모든 자들에게 다같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편들을 잘 사용함으로써” “학식이 있는자들”과 “학식이 없는 자들”이 모두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알고, 믿고, 지켜야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얻을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7조.  한번 더, 우리는 은혜의 일반적인 방편들의 이점을 알게된다.  말씀, 성찬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믿음을 행사함으로써 우리는 영적인 지식에서 자라가게 된다.

  • 확신

많은 신자들은 구원의 확신때문에 고군분투 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가?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일반적인 방편들을 제대로 사용함으로써” 그 확신을 얻는다고 가르쳐 주기에 큰 도움이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장 3조).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미 중지되어진) “특별한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느다.  일반적 은혜의 방편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특별 계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은 교회를 위해 필수적이다.

전심으로 일반적 은혜의 방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교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1)그것은 대부분의 교단들이 추구하는 방향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전도운동이 새로운 것을 강조하며 나아가는 것인 반면, “일반적 방편”교회들은 더욱 그리스도 중심으로 될것이다. 

2)그것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하며, 세상과 사람의 영리함 그리고 사람이 만든 대책들에 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3)그것은 점점 더 성경과 종교개혁의 원칙들과 부합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혼동이 가득한 때에 명료성과, 당황과 절망하는 시대에 희망과, 쇠퇴하는 때에 부흥과 속임수가 가득한 시대에 신실함을 의미한다.

4)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신다는 진리를 진정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그분께서 제정하신 성찬을 사용하기를 그분께서 세상에 다시 돌아오실때까지 계속하도록 명령하셨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 의하면, “일반적인 방편”을 사용하는 교회는 그 교회의 주님께 무엇보다 순종하기를 구하는 교회이다. 

은혜의 방편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65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든 혜택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럼 그 믿음은 어디서 옵니까?

답. 성령께서 복음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며, 성례를 사용하시어 그 믿음을 확증하십니다.

98문. 하지만 교회에서 평신도를 가르치기 위해 성경 대신에 형상을 사용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답.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도 못하는 우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생한 말씀의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백성들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도르트신조

  1. 3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려고 자비로우시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보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 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르신다.  로마서 10:14, 15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2. 16조. 그리스도께 대한 살아 있는 믿음, 확실한 마음의 신뢰, 양심의 평안, 어린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이 순종하려는 열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아직 자신 안에서 활발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런 일들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시며 이를 위해 주신 수단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유기에 대해 들을 때 불안해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들을 유기된 자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실 때를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

3-4장 17조.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 생명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일하심은 수단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수단을 반드시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을 따라 그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권능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이처럼 앞에서 말한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하심은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거나 무효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크신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과 사도들을 이어 가르치는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은혜에 관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낮추도록 경건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사도들과 교사들은 복음의 거룩한 권고를 따라 말씀과 성례와 권진의 시행 아래서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기쁨 안에서 함께 밀접하게 결합하기 원하신 것을 나눔으로써 감히 주제넘게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은혜는 권고를 통해 주어지며,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더욱 기쁘고 즐겁게 행할수록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이 더욱 빛나고, 하나님의 일하심도 더욱더 진전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을 주시고, 그 수단을 통해 구원하는 열매와 효과도 주시는 하나님 홀로 영원히 모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

5장 14조.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를 통해 우리 안에서 이 은혜의 일 시작하기를 기뻐하셨던 거처럼, 하나님께서는 또한 복음을 듣고 읽는 것, 복음을 묵상하는 것, 복음으로 권고하는 것, 경고, 약속, 그리소 성례의 시행으로 이 은혜의 일을 지키시고 계속하시며 완성하신다.

벨직 신앙고백서

29조. 참된 교회의 특징에 대하여…참된 교회임을 알 수 있는 특징들은 이러하다: 순수한 복음의 교리가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성례가 순수하게 집행되고 있는가.  죄를 처벌함으로 교회의 권징이 실행되고 있는가.  요컨데 모든 것들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경영되고 있으며 말씀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이 바로잡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하고 있는가.  이 특징들로써 참된 교회를 확실히 알 수 있으며 이 참된 교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권한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33조. 우리는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결함들을 아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들을 인 쳐 주시기 위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은혜를 보증하는 담보물을 주시기 위해, 또한 우리의 믿음을 길러 주시고 강하게 하시기 위해 성례를 제정해 주셨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과 성례를 결합시키셔서 우리의 지각으로 하여금 말씀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과 우리 마음에 내적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더 잘 깨닫게 하시며, 이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을 우리 안에 확신시키시고 확증하신다.  성례는 내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시적 표와 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시기 위한 수단이다.

트레버 커얼크랜드 목사님은 Ballyclare와 Doagh 스코트랜드 자유 교회 (Continuing)을 섬기고 있다.  이 글은 스코트랜드 자유 교회 (Continuing) 교단의 잡지, 자유교회 증거 (The Free Church Witness) (2019년 2월호)에서 허락을 받고 게재하였는데, 자유개혁교회는 제한된 서신 관계를 이 교단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