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육하심:
겸손 안에 담긴 위로와 가르침
크리스마스에 가족들과 의미있는 시간들을 보내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나누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현실을 오늘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혼동과 세상의 방해로부터 분리해 내야하는 어려운 임무에 직면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마굿간에서 동정녀에게 태어난 가난과 겸손은 우리가 모든 것을 사치스럽게 장식하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혼잡고 번잡함으로 혼동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분의 겸손한 희생을 전달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위로와 우리의 모본을 위해서 가르쳐주고 있다.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는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아들이도록 부름을 받은 가난한 교회를 향해 글을 쓰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마음을 두고 있는 공동체를 향해 쓰고 있다. 우리는 빌립보서 2장 1절로 2절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을 읽게 된다. 바울은 5-8절에서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의 성육하심의 현실은 그분께서 영광에서 겸손으로, 부요하심에서 가난으로 그리고 왕에서 종이되셨다는 것이다!
영광에서 겸손으로
그리스도의 성육하심의 현실은 그리소도께서 영광에서 겸손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수치스럽게도 우리는 그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기때문에 누가복음 2장 6절로 7절까지의 말구유 장면을 향수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7절까지 다음과 같은 현실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한 영광 속에 영원히 거하고 계셨는데 사람이 되셨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중단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서 그는 똑같은 사람의 특징을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서 그는 그의 인성 뒤에 그의 위엄과 영광을 감추셨다. 이사야 53장에서 우리는 그가 무시당하시고 거절당하셨음을 읽게된다. 실제로 그의 인생동안 그분은 미움을 당하셨고, 수치를 당하셨으며, 거짓되게 비난당하셨고, 명성을 잃으셨으며, 너무나 가혹하게 대우를 받으셔서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어떤 아름다움도 그분 안에 있지 않게 되었다. 겸손과 자기 부인은 그분의 삶의 비밀이었다!
자기부인과 겸손은 우리 누구에게도 자연스러운 특성이 아니지만 이사야서 52장 13절로 53장 12절 (마지막 종의 노래)그리고 빌립보서 2장 6절로 11절은 우리 앞에 겸손을 통해서 참된 성공과 높임을 우리 앞에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의 깊이를 보게 될때, 우리는 그가 또한 높임을 받으시고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주어지신 것을 알게 된다! 그분은 또한 우리의 인성 속에서 우리와 같이 되기 까지 매우 겸손해 지셨는데 지금은 하나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높임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그휼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시다.
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하신 겸손을 절대로 필적할 수 없을 것이지만, 바울은 우리가 이 마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하고 있다 (빌립보서 2장 5절). 우리는 겸손의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받을 필요가 있지 아니한가? 빌립보서 2장 2절로 3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확신이 가도록 기록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우리가 “짐을 서로짐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면서 우리자신 보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더 낫게 여기자 (갈라디아서 6장 2절).
부요에서 빈곤으로
성육하심의 현실은 그리스도께서 부요로부터 엄청난 빈곤 속으로 태어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사도바울은 고린도 후서 8장 9절에서 설명한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만일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가 그들 가족의 삶이 얼마나 부요하고 그들의 사회적 삶이 얼마나 누릴 수 있을까를 꿈꾸고 있었다면 그녀는 실망하였을 것이다. 그는 말구유에서 태어나 강보에싸여 곧 애굽으로 도망하면서 끝내는 나사렛의 작은 마을로 돌아오실 것이었다. 예수님은 완전히 사람이셨다. 그는 똑같은 음식을 드셨고 똑같은 옷을 입으셨으며, 다른 소년들과 같이 같은 말로 의사소통하셨다. 그분은 가난하셨고, 목마르셨고, 피곤하셨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고통을 경험하셨다. 그분은 우셨고, 화를 내셨고, 사랑을 받으셨고, 증오의 대상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빈곤 속에 있는 사람의 형태 가운데 계셨다. 크리스마스 성가 “멀리 떨어진 곳에”가 아름다운 만큼, 그 성가가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제안하면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소들이 울음소리를 내고 어린 주 예수는 울고있지를 않네.” 예수님은 진정으로 어린 아기와 같이 그가 그의 어머니의 돌보심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으시면서 울고 있으셨다.
때때로 목사님들은 자신이 구원받기에 너무 큰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씨름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 고뇌하는 영혼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부요로부터 가장 가난한 아이가 되시기 위해 가장 고통받는 인간이 되시기 위해 심지어 그의 옷마져도 다 벗으시고 그분께서 골고다에서 우리의 죄로 짐지으시면서 강림하셨다. 그분의 빈곤은 그분의 하신일이 충분하다는 확신으로 참된 고뇌자를 위로하고 무관심한 영혼들을 핑계할수 없도록 한다.
그리스도의 빈곤은 우리에게 풍성한 가르침을 전해 준다. 빌립보서 2장 4절에서 우리는 “각각 자기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드를 돌아보아”라고 읽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빈곤을 생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우리가 관대하기 주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또한 고린도후서 8장의 메시지 인데, 바울은 마게도니아 교회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필요를 위해서 연보를 거두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의 가난이 또한 궁핍 속에 있는 자들에게 후하게 되게하여 주시길 기도한다.
왕에서 종으로
마지막으로, 성육하심은 우리 앞에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창조주 이시며 왕중의 왕이시기에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왕되심은 다른 것들과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종의 형태를 취하셔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순종하셨기에 그렇다. 그분은 누가복음 22장 27절에서 그분의 종되셨음의 참된 특징을 강조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안자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마가복음 10장 44절, 45절에서 예수님은 가르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3장에서, 주 예수님은 종으로 수건을 두르시고 그의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었다. 그분의 종되심의 가장 최종적인 행위는 죄인을 구하시려 십자가에서 죽으심이었다. 그분이 자기 아버지를 섬기듯이 영광의 왕께서는 종의 자리를 받아들이셔서 죄많은 사람들 즉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들과 함께 사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라. 사람의 창조주께서 사람이 되셨다. 구분은 별들을 궤도 위에 올려 놓으신 분이신데 자신의 어머니의 가슴에서 아기로 젖을 먹으셨다. 하늘과 땅의 심판자이신 분께서 죽음을 수 밖에 없는 재판관의 심판 아래로 끌려 가셨다. 완벽하게 의로우신 분께서는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 정죄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가장 저주 받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지만 고통과, 숨막힘과 수치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당신의 마지막 숨을 들이 시기 전에 천번이나 죽는 것과 같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여러분은 그분의 겸손의 깊이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계시고 계속해서 하나님이시면서도 그의 권위를 사용하시기를 포기하시고 자신의 왕되신 부요함과 왕의 영광을 사람으로서 포기하신 그 심오한 신비를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작고 제한된 생각에는 그분이 종이 되시기 까지 낮아지셔서 복음이 이 크리스마스에 우리 앞에 분명히 나타나게 됨으로 우리가 그것을 믿고 그로 인해 위로 받고, 그것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사탄의 유혹을 따라 하나님과 동등된 것으로 생각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그만하자 (창세기 3장 5절). 차라리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에 심취하기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겸손히 자신을 비우게 되는 은혜를 구하여 우리 강림하신 구주의 영광이 되도록 하자.
스캇 디벳 목사님은 온타리오 세인트 조지 하나님의 섭리 자유개혁교회의 목사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