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기뻐할 때 (2)
“그리고 그 성에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8:8
지난 번 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도시들은 전도자 빌립이 사마리에서 복음을 가져왔을 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그들이 회심했을 때, 사마리아가 경험한 것과 같은 똑같은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알아보았다. 우리는 이 본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웠다. 첫째, 복음이 가져 오는 기쁨은 핍박과 어려움을 통해서 올 수 있다. 둘째, 복음이 주는 기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찾아온다. 셋째, 복임이 주는 기쁨은 참된 회심의 열매이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복음의 기쁨이 도시든 어느 곳이든 그것이 나타나는 그곳들에서 작용하는지에 관한 몇가지 추가적인 교훈들을 알아 보고자 한다.
넷째,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성령을 통해서 찾아온다.
성령은 사도행전 8장 15절에서 17절까지 이르기까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분명히 도시에서 경험된 기쁨 뒤에 있다. 그리스도의 영은 사도들과 초대 교회 (사도행전 2장 1-4절)에 부어졌다. 그는 사도들의 사역 속에서 활발하셨는데, 그들의 설교와 설교를 확고히 하는 기적들에 대해서 그러하셨다. 빌립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설교하였들 때, 성령은 그 사람들에게 말씀 하셨다. 그는 그들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확인시켜 주셨다 (요한 복음 16장 8절로 11절을 보라). 그는 거짓된 기쁨들을 드러내셨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되는 근원들을 붙잡는 우상을 파괴하였다. 우리 모두는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본성상 우리는 절대로 기쁨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장소들에게 그 기쁨을 찾는다. 성령께서는 진정으로 기쁨을 가져오는 사람의 마음 속에 공간을 만드신다.
성령께서는 절름발이를 고치고 병든 자를 낫게 하는 것 그리고 부정한 귀신 들린 사람들로부터 그것들을 제거하는것 만큼이나 강력하고 저항할 수 없도록 이 일을 행하신다 (사도행전 8장 7절을 보라). 이러한 부정한 영들과 질병들은 엄청난 불행과 절망을 가지고 왔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그것들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분의 위로하심음 기쁨을 가지고 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분이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했다 (누가 복음 4장 18절-19절을 보라). 영적으로 그리고 육신적으로 엄청난 복음의 생명과 자유가 나타났을 때 누리는 영적인 기쁨을 상상해 보라. 이 기쁨은 전쟁이 끝났을 때 보다 왕을 방문하는 것 보다 그리고 하늘에서 금과 은이 떨어질 때 보다 더 나은 기쁨이다. 성령께서는 광야가 기뻐하도록 만드셨고 그 결과 슬픔과 탄식은 사라지고 있었다.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릿속에 있었고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 등 (갈라디아서 5:22)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쁨을 위하여 성령의 필요를 보고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 외에는 진정한 기쁨은 없다. 인생의 얄팍한 기쁨은 만족스럽지도 못하며,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의 일이나, 예식, 또는 전통도 이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주께로 가지 않은채 우리의 삶은 이를 갈며 슬퍼할 장소에서 영원한 불행 속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8:12).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다섯째,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우리는 빌립이 말씀을 전했다고 읽지 않고,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했다 (사도행전 8:5)라고 듣는다. 사람들은 어떤 사역자들을 “그리스도 설교자”라고 말하곤 한다. 그것으로 사람들은 설교가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아님을 의미한다. 설교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신성 안에 있는 위엄과, 은혜 그리고 성령을 전해 주신다. 궁핍한 영혼들은 그리스도가 필요로 하며, 그리스도 아닌 것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가져야 하며, 그분을 붙들고 그분을 안으며, 그분을 먹고 마실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한복음 7:37). 그리스도는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사마리아는 본질적으로 주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 때, 그 아이들이 기뻐하였고, 그 도시가 경험하였던 것을 경험하고 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9:9).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쁨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기초를 하고 있다. 만일 그분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우시기 위하여 저주가 되지 않으셨다면 기쁨이나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그분은 자신에게 슬픔의 원인을 지셨는데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는데, 이는 그분의 백성들이 기쁨의 찬양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백성들을 기뻐함이 매우 깊고 높아서 모든 하나님의 성품이 십자가에서 죽으심 속에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다음과 같이 말하실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분은 기쁨이 있으셨고, 심지어 그 십자가의 고뇌도 그것을 없앨 수 없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하나님의 백성들이 슬플 때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구주를 그리워한다. 그들이 그분을 바라봄이 흐려져 있다. 마리아와 같이, 그들은 누군가가 그분을 데려간 것 처럼 느낀다 (요한 복음 20장 13절을 보라). 또는 그들의 희망과 기쁨을 잃어버린 엠마오로가는 제자들과 같이 느낀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만 채울 수 있는 고통스러운 허무함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이런 밤들은 슬픔의 밤들이지만, 기쁨의 아침이 이런 밤들을 따라올 것이다 (시편 30:15). 기쁨이라는 이름을 마땅히 가지신 그분이 나타나는 때에 그런 기쁨의 아침이 나타날 것이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기쁨이 되셨다 (잠언 8:30). 그분은 그의 백성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셨고, 그분은 그들의 힘과 노래이시다 (출애굽기 15:2). 그분은 그의 백성들이 그를 즐거워 할 때 높임을 받으시고, 그분의 찬송을 열국가운데서 선포하신다. 모든 사람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셀수 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제한 없는 기쁨을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여섯째, 복음이 주는 기쁨은 하나님의 교회가 빛나는 백성이 되게 한다.
사도행전 8:8은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기쁨은 몇몇 집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으며, 다만 이 큰 공동체 곳곳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기쁨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의심할 것 없이, 사람들은 거리 모퉁이에서, 시장에서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서 그들의 기쁨을 나누며 서로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을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웃이 고침을 받은 것과, 마귀에 사로잡힌 자들이 자유롭게 된 것을 서로 서로에게 이야기 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졌고 그 기쁨은 분명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마술사 시몬의 사악한 마법의 칙칙한 어둠과 죄가 가져다 주는 여러가지 불행들을 생각하는 대신에 일어나서 지나간 날들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빌립의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며, 주 안에서 새로운 형제와 자매들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지상에서 찬국을 맛보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참된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을 채울 때, 여러분은 그것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은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넘쳐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5절에서 “내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합니다 (로마서 12장 15절). 한 사람의 기쁨이 흘러서 교제와 섬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갈 때 이것은 얼마나 기쁨을 줍니까!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복음의 기쁨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것은 마치 온 세상이 모든 창조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빛나며, 기쁨이 넘치는 신부이며, 신랑은 그 신부로 인해서 기뻐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사야 62:5).
일곱번째,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죄와 적들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사마리아 성에서의 기쁨에 대하여 읽기를 마치자 마자 마술사 시몬을 주변으로 일어난 사건이 나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믿음을 고백하였지만 사기꾼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도행전 8:9-24). 이 문제는 이 어린 교회에 큰 타격을 주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소의 사울과 같이 그가 가는 곳에서 경고의 메시지를 울리는 다소의 사울과 같이 명백한 적을 가지는 것은 한가지 일입니다. 그러나신자인 것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뜻에 위협이 되는 양의 탈을 쓴 늑대와 함께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쁨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성경은 주를 기뻐함이 우리의 힘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아 8:10). 모든 그리스도인은 힘을 필요로하는데 사탄은 그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천가지 방법을 써서라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힘이 필요하고 적을 대항하여 강력한 방어를 필요로 합니다. 주께서 주를 기뻐함이 바로 그 필요한 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기쁨을 주시는데 사탄이 공격해 오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 공격이 내부에서 또는 외부에서 올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 가족들 그리고 교회를 불안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기뻐함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께서 주시는 그 기쁨을 우리는 얼마나 소중히 지켜야 하겠습니까! 우리들 가운데서 주님을 기뻐함을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갈망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 기쁨을 나눌때 우리는 잃는것이 아니라 대신어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기쁨을 잃었을 때, 우리가 처음에 그것을 얻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구합시다. 즉,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깊은 기쁨의 우물로부터 길어올리며 그 말씀을 믿음으로 말입니다. 주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까지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하십시다. 주님을 기뻐하는 즐거움에 참예하십시오 (마태복음 25:23).
결론적으로, 복음은 이 땅에 있는 농촌이나 섬들을 위할 뿐 아니라 도시들을 위한 진정한 기쁨의 원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의 복음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는 그리스도인의 선교의 결과로서 기뻐하게된 첫번째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만 그것이 마지막일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콘스탄티노플, 제네바, 런던, 부다페스트, 뉴욕, 해밀턴, 케이프타운, 서울, 세이튼 존, 보고타, 마닐라, 샹하이 그리고 수백개도 더 많은 곳들을 언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도시들도 그 전례를 따를 것을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사마리아 성이 경험한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천국 도성이 얼마나 기쁨의 도시가 될 지에 대해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국도시의 무수한 무리로부터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슬픔과 탄식이 더이상 있을 수 없으며, 기쁨과 즐거움이 모든 사람에 있는 그 도시의 거주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