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가득찬 신학 (2)

기쁨으로 가득찬 신학 (2)

도르트 신조는 다른 많은 부정적인 표현들 중에 “작고 오래된 작품,” “매우 정교하게 조정된 신학적 작품,” 그리고 “가장 유명하지만 어떤 개혁주의 총회에서도 읽지 않는 회의록” 으로 불려졌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기쁨으로 가득찬 신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도르트 신조를 기쁨으로 가득찬 신학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하고 변호하길 원한다.

지난 달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쁨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또한 우리의 영적인 삶을 강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찾도록 격려하는 성경적 증거를 살펴보았다 (느헤미아 8:10). 우리는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찾는 다섯 가지 방편들을 요약하였고, 가장 안정적인 기쁨을 얻는 가장 최고의 방편은 도르트 신조엣 고백된 은혜의 교리들을 알고 믿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런 더욱 객관적인 접근이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주관적 기쁨을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기쁨을 증진시킬 수 있는데 접목 시킬 수 있는 성경의 다른 많은 교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든 성경적 교리들이 영적인 기쁨을 샘솟게 하고 자라게 하기 위해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은혜의 교리들이야 말로 모든 다른 교리적 기쁨들이 의존하고 있고, 기초로 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초석들과 같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것들 없이는 모든 다른 교리적 기쁨들은 더 이상 진전할 수 없고 사라져 버리고 말게 될 것이다.

기쁨의 표본들
이렇게 짧은 글에서, 나는 은혜의 교리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쁨들의 한 표본만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좀 더 추가적인 독서를 통해서 이 기쁜 우물을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렉 포스터의 “칼빈주의가 주는 기쁨: 하나님의 개인적, 무조건적,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알아가기:
 하나님은 당신을 개인적으로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당신을 무저항적으로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당신을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신다.

혹은, 토니 레인케의 “기쁨 프로젝트: 칼빈주의 개관”에 수록된 분명한 기쁨을 주목해보라:
 세상의 기쁨 비극
 기쁨 프로젝트는 설계되었다.
 기쁨 프로젝트는 값을 지불했다.
 기쁨 프로젝트는 무너뜨리고 들어간다.
 기쁨 프로젝트는 풀고 전개한다

또 다른 예는 다니엘 몽고메리와 티모씨 폴 존즈의 “증거: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도취시키는 기쁨을 통한 자유 찾기”가 있다. “증거”라는 책의 주요 제목은 각 장의 제목들의 첫 영문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다.

 계획된 은혜
 부활의 은혜
 터무니없는 은혜
 극복하는 은혜
 영원한 은혜

자, 이 모든 책들의 각 장들이 정확하게 은혜의 교리들로 연관되지 않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교리의 기쁨을 전달하기위해서 그와 비슷한 일반적인 윤곽선과 비슷한 관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 저자들이나 나는 오직 칼빈주의자들만이 기쁨을 가지고 있다라고 암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스터가 말한 대로, “만일 당신이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명령을 이해하길 원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순종하기를 더욱 원한다면, 그 문제에 대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모든 영역들 중에서 가장 최상의 장소는 칼빈주의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칼빈주의자들이 항상 은혜 교리들을 설득력있고 매력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고 체계를 잡지는 않았다고 시인한다. 오히려, 우리는 자주 정말 기술적이고, 공식화된, 극도로 체계적이며, 부정적인 교리적 전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의 마음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기쁨이되게 한다. 더 자주 보게 되는 반응은 지루함, 혼돈 그리고 관련 없는 것과 같다. 포스트는 말하기를, “그들은, 부분적으로 혹은 전반적으로 튼튼하고 잘 형성된 칼빈주의의 경건이 항상 만들어내고, 그리고 칼빈자의자들로서 함께 살아가야할 그런 경건한 기쁨을 매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개인적 기쁨
개인적인 측면에서 나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더 은혜의 교리 속에서 기쁨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예를 여러분에게 들어 보겠다. 나는 나의 전적인 타락, 내 존재 모든 영역의 부패함, 나의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그어떤 것도 영적으로 기뻐하실만한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여러분은
“그게 어떻게 기쁜 것인가요?” 라고 반문한다. 좋은 질문입니다! 만일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의 죄많고 소망없는 상태로 계속 지내고 거기에 빠져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즐거움이라는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을 약화시키거나 그런 고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모든 다른 교리의 기쁨을 소모시키게 된다.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구원에 내가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에게 더 많은 기쁨을 누리며, 내 구원의 영광을 우리들끼리 나누어 보려고 하는 시도보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원인을 돌리는 것에서 더 많은 기쁨을 누린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음에 기뻐한다. 나에게 있어서 기쁨과 놀라움의 가장 큰 원천 중의 하나는 다음의 세가지 질문들이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전 4:7). 또다른 기쁨의 깊은 원천은 고린도전서 1:26-29절에 있는 바울의 말을 인용해서 나 자신을 묘사하는 것이다: 어리석고, 무능하고, 천하며, 멸시 받고, 없지만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자!

나는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로 인해 기뻐한다. 나는 지금 현재 지옥에 있으면서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제공된 그런 속죄를 통해서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일반적인 “속죄”는 나에게 있는 분별력을 없애버리고, 나에게 단 한 순간의 기쁨을 절대로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동안, 그리고 고난당하시며,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는 동안 구체적으로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 나를 특별히 생각하셨다는 것 – 이것 자체 만으로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제한된 속죄는 확실한 기쁨을 준다.

나는 성령님의 저항할 수 없는 사역으로 인하여 기뻐한다. 성령님께서 언젠가 나의 마음을 정복하고, 내 영혼을 얻고, 나의 인생에 침투하시기 위해서 계획된 신적인 임무에 임하셨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바로 이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기쁨이 된다. 그분께서 나의 모든 반대를 단호하게 극복하시고, 나의 모든 변호를 무너뜨리시고, 나의 모든 저항을 산산조각 내시고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가 들어 간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거할 것이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나는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사역으로 인해 기뻐한다. 이것 없이 나는 믿음에 계속 인내할 수 없고, 단 한루도 견딜 수 없다. 내가 혼자 시작할 수도 없고, 내가 혼자 버텨낼 수 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그것을 하고 계신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제한된 타락을 믿으며, 구원을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로 보고, 실제로 죄사하지 않는 속죄를 믿으며, 성령님의 구원 사역을 보조하고, 실제로 자신들이 구원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구원을 믿으며 더 많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건 정말 전적으로 우울하게 만든다고 느낀다. 나에게 은혜의 교리를 전하라,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기쁨 필터”를 통해서 도르트 신조를 읽고, 은혜교리들이 기쁨의 교리들이 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발견하게되기를 권면한다.


데이비드 메레이 박사는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청교도 개혁 신학교에서 재직 중인 북미자유개혁교회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