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고소당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대가 하지도 않은 말이나 일을 했다고 의심을 받더니 고소당하고 심지어 유죄판결을 받은 적이 혹시 없습니까? 성경의 복음서에는 주 예수님께서 거짓 고소를 당하시고 이 거짓 고소를 따라 유죄판결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8절에서 32절에서 예수님은 거짓 고소를 받아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이 거짓 고소를 따라 불의하게 정죄 받으셨습니다. 이 장면을 곰곰이 묵상해보셨습니까? 왜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조롱받도록 내버려두셨는지 궁금하신 적 없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독생자가 이렇게 학대당하게 허락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당신의 독쟁자를 학대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악한 일을 바라보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다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부모인 우리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조롱과 멸시와 학대를 당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떨까요?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에게 외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학대당한다면 어떨까요?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더욱이 아들은 아무 죄도 없고 결백하다면요? 그래도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 장면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면 마음이 찢어질 것입니다. 누가 끼어들지 말라고 총칼을 들이밀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하늘에 계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이 이토록 큰 모욕과 멸시와 불의를 당하시는 것을 보고도 참으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학대하는 악한 사람들은 무서운 진노로 단번에 불태우실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다 그대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그대가 구원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이 당신의 독생자를 학대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 있습니까? 이 사랑을 알고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대가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이 아직도 의심됩니까?
예수님께서 산헤드린에서 붙잡혀 있을 때 풀려날 힘이 없어서 매여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뺌을 때리도록 한 대제사장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단숨에 태우시고서 묶인 줄을 풀어 당당히 걸어 나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한 학대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안나와 가야바와 모든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이 당신의 심판대 앞에 서서 영원한 벌을 받도록 정죄받을 날이 올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지극히 크신 겸손으로 한치의 반항 없이 이 모든 수치와 모욕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사 53:7).
예수님은 이런 거짓 고소와 악행에 맞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잠잠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나는 배고픈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눈먼 자를 보게 했다. 나는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았고, 나의 명예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친구로 살았다”라고 사실대로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였다”(눅 4:18)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고소들에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안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자신더러 악인이라고 하는 고소에 아무런 자기 변호를 하지 않으신 것은 모두 그대를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대신해서 정죄 받고 심판받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그대와 저를 대신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악인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흠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대를 위해서 죄인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소를 듣고서도 입을 열지 않고 잠잠하셨습니다. 정작 자신에게는 죄가 없지만 그대와 저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말고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만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합시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 살수록 우리 안에서 죄는 힘을 잃고 은혜는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면 그분의 고난의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죽인 우리의 죄를 더욱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죄에서 도망칠 것입니다. 죄가 완전히 패배할 때까지 우리가 죄와 맞서 싸울 유일한 무기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힘으로 죄를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또 그분을 통해서만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생각할수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사랑스러운 분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보니 예수님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든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 그대가 예수님을 의지하길 거부한다면, 그 책임은 그대에게 있습니다.
- 그대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 책임은 그대에게 있습니다.
- 그대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책임은 그대에게 있습니다.
- 그대가 그대의 죄로 멸망한다면, 책임은 그대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사랑스러우시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땅과 지옥 모두 한목소리로 빌라도가 예수님께 한 판결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예수님께는 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셨습니다. 단 한치의 실패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산헤드린과 빌라도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는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대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은 또한 그대의 불신앙과 의심까지 짊어지시고서 그대를 위해서 정죄 받으셨습니다! 이런 주님께 그대의 마음이 이끌리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8장은 우리 주님께서 그대를 위해 받으신 고난의 일부를 기록합니다. 그가 가난해지신 것은 그대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나의 주여, 주께서 받으신 고난이 모두 죄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니,
죄를 지은 것은 저인데, 죽음의 고통은 주께서 겪으셨습니다.
나의 주여! 제가 여기 엎드립니다. 제가 받아 마땅한 일을 주께서 받으셨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저를 봐주시고 주의 은혜로 저를 찾아오소서!
나의 귀한 친구 주님, 어떤 말로 주를 향한 감사를 표현하리이까,
절 위해 겪으신 죽음의 고통과 끝 없는 고난을 어찌 다 말로 하리이까
주여, 저를 주의 영원한 소유로 삼으소서,
주여, 제가 영원토록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
존 쿱만 목사님은 브리티시 콜롬비아주의 칠리웍 자유개혁교회 목사님입니다.
202003 메신저 잡지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