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나의 세례로부터 유익을 얻을까? (2)

어떻게 하면 나의 세례로부터 유익을 얻을까? (2)

어떻게 하면 나의 세례로부터 유익을 얻을 있을까? (2)

지난 편에서, 맥크라우드 목사님은 우리의 세례를 증진시킴으로써 얻게 되는 두가지 이점들을 보여 주었다 (웨스트 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 167문).  즉, 첫번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일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리고 두번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하신 것을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번 편에서, 맥클라우드 목사님은 계속 해서 세가지 더 이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언약의 자손들을 양육함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  내가 받은 유산은 크고 좋다.  그러나 나의 가족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에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을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그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위치와 특권은 무엇인가? 특권과 축복에 관하여, 아이들은 그들의 경건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표성 아래서 다루어진다.  우리는 종종 부모의 믿음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는 자녀에 대해서 읽게된다 (마가복음 7장 29절; 9장 23절-27절; 요한복음 4장 49절-50절).  삭개오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였을때, 우리는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고 읽게 된다 (누가복음 19:9; 참조. 사도행전 11장 14절; 16장 31절).  이것은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그 부모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약적 지위, 특권 그리고 축복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그 믿는 부모에 의해 대표되는 온 집안을 다루신다는 것을 그것은 말해준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에 대하여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두려운 의심이나 추측하도록 방치되지 않았다.  피에르 마르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들에게 물어보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을 괴롭히는 두려운 불안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시는가?’[1] 아무 대답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이 특정한 아이가 그분의 언약에 속한 자손이며, 그 아이를 위한 영원한 구원을 위한 모든 필수적인 지원이 이미 만들어졌고 그에게 혹은 그녀에게 전부 값없이 주어졌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부모 혹은 그들의 자녀들이 어둠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이 그들의 구원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하셨다.  만약 언약 자손이 마지막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거나 자신의 뜻에 대하여 불분명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또는 그를 위해서 복음 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언약 자손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의 은혜의 제안들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언약의 자손들은 불신자들이 될 아무런 권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셨다.  지속적으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주장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은 언약을 어기는 것이며, 가장 심각한 언약의 저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9절).

이 모든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인되심을 의미할 뿐 아니라, 나의 자녀들에게도 그러하심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네가 돌보도록 맡겨 놓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특별히 아이가 어린 시절을 통해서 그녀의 혹은 그의 세례의 유익이 대부분 부모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하게 부모의 엄청난 책임을 수반한다.  만일 생각하고 실행한다면, 이 책임은 부모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 준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맡겨진 자신의 자녀의 영혼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통해서 진지해 왔다.  당신 자신의 영혼을 간과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한 가지 일이라면, 당신 자녀의 영적인 죽음에 대해서 책임지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누가복음 16장 19절로 31절을 보라). 이 엄중한 세례의 책임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참된 종교의 능력을 예시하여 보여 주는 것을 포함한다.  부모들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고린도 전서 11장 1절).  이것은 우리 아이들의 일찍 구원 받을 것에 대하여 매일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그분의 은혜를 의존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완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가 실패하였을 때, 회개하는 법을 가르쳐 보여준다. 

이 책임은 아이들의 어린시절 부터 필수적인 복음의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예배 후에 (특별히 세례식을 참관한 후에), 가정 예배에서, 그리고 평범한 대화속에서, 아침에, 잠자기 전에,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루어진다.  이런 방법으로 부모들은 그 아이에게 세례가 가르치는 바를 가르쳐준다.  세례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죄악 가운데 태어났고 죄악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시편 51:5), 그들이 엄청난 죄인들이라는 것 (시편 25장 11절), 그리고 그들이 너무 어려서 죽을 수 없지 않다는 것을 (사무엘하 12장 18절)그리고 그들이 거듭나야만 한다 (요한복음 3장 7절)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세례는 또한 부모와 아이에게 그 아이가 너무 어려서 구원을 받을 수 없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부모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구원이 그들의 영아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한다.  제임스 배너맨이 말하듯이, “성령에 의한 중생의 역사는 그분께서 성숙한 어른에게 역사하실 수 있는 것 만큼이나 영아의 어린 나이에게도 쉽게 역사 하실 수 있는 일이다.”[2]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순간부터, 부모님들은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강권해야 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필요가 그들에게 있을을 보여주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세례를 통해서 그들에게 이것을 베풀어주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저 유명한 성경주석가 매튜 헨리의 아버지 필립 헨리에 대하여 이런 기록이 있다.  “그 자신의 자녀들의 영적인 상태를 다루면서, 그는 그들의 유아 세례를 이해함으로써 그것들을 잘 붙잡았다.  그리고 자주 그들의 마음 속에 그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심어주었고, 그들이 드려진바 되었고,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3]  이 어떤 것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이를 구원하지 않지만, 주님의 축복을 통해서, 로버트 댑니가 말한 것처럼, “세례의 성찬 속에 드러난 임무를 충실히 따르는 곳에, 아이들의 실제적인 중생이 일반적인 결과”라고 한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이다.[4]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공급하심을 인정함을 통해서

이렇게 자라나는 언약 자손들에게 어릴 적부터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태어남으로써 그들이 누리게 되는 엄청난 유익을 깊이 알려주어야 한다.  내가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나는 먼저 누군가에게 기도를 받는자였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나와 맺으셨다.  아이가 우리의 큰 저택과 부유함 속으로 태어나게 되면서 비참한 가난 속에 태어난 아이에 비해서 많은 혜택들을 누리는 것처럼 (의복, 음식, 건강 관리, 교육), 언약의 가정 속으로 태어난 아이는 언약의 가정에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 비해서 많은 영적인 유익들을 가지게 된다 (로마서 3:1-2).   이 아이는 “가정 안에 있는 교회”의 즐겁고 형안한 분위기를 경험한다.  더글라스 배너만은 “교회의 내적인 삶”을 “기도와 찬양의 분위기”라고 묘사한다.  그가 말하기를, “백이십 명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며’ 다락방에서 시작하는 장면에서부터, 또한 마리아의 집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그 역사의  마지막 장면까지 단합된 기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사도적 교회에 울려 퍼지고 있다.”[5]  또한 그리스도인의 집에서도 그러하다.  즉, 말씀의 가르침, 모범, 훈련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기도와 찬양의 분위기가 그곳에 있다. 

초대 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두, 세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 아이가 아니겠는가?”[6]  크리소스톰의 마태복음 18장 20절의 주해를 의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 뒤에 있는 그 생각은 완전히 정확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들의 하나님이시다.  ”그 전체적으로 친절하고 구속적인 영적 실제가 그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장인들은 각각 하나님, 그의 부모님들, 그리고 점진적으로, 그의 형제들, 자매들, 친구들 그리고 교회이다.”[7]

이렇게 어려서부터 받게 되는 영향들은 언약의 자녀 안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고취시켜야 한다.  “내가 그 모든 특권과, 모든 은혜의 방편과, 성도의 교제와, 나를 위해 기도해준 분들과,  부모로서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이 나의 영적인 유익에 있게되는 그런 교회안에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유익한가.  어려서부터 내가 나를 구원에 지혜롭게 되도록 해줄 성경을 알았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63번을 보라).  이 모든 세례의 유익들로부터 유익을 얻게 되는 하나의 방편은 그것들을 그들에게 주신 주님의 위대하신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시편 116:12; 디모데후서 1:5).

그리스도와 개인적이고 구원하는 관계를 구함으로써

지금까지, 이런 외적인 세례의 유익들은 엄청나다. 우리가 이것들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금하시길 구한다.  이것들은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값주고 산 선물들에 속한다 (시편 68:18-19; 에베소서 4:7-16).  그러나 그것들 자체만으로, 이러한 외적인 유익들은 구원할 수 가 없다.  스코트랜드에 있는 돌아가신 나의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사탄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하는 절차에 들어가지 않는한 당신이 얼마나 깊이 종교에 빠져들어가는지에 관심이 없다.”  지옥에는 세례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즉, 외적인 복음의 특권의 관점에서 탁월한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외적인 특권들 때문에, 그들은 끝없는 영원한 세상을 마귀와 마귀의 타락한 천사들, 그리고 도둑과 강도들, 창기들과 보내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6:9-10; 요한계시록 19:20; 20:15).

왜 그런가?  왜냐하면, 세례가 정말 귀하고 유익하다 할지라도 그 표시와 인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표시되고 인쳐지는 은혜를 구원할 정도로 받는다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익이 되는 복음의 설교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세례 또한 그러하다.  찰스 하지는 “한 사람이 복음을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일때에, 그는 복음이 약속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 그가 믿음을 행사하면서 세례를 받을 때, 그는 세례가 표시가 되고 인이되는 그 혜택들을 받게 된다.”라고 기록한다.[8] 세례의 유효성은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약속에 근거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세례를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을 통해서 “증진”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례로부터 얻어야만 하는 가장 위대한 유익을 알려주는데, 바로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찾고 발견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로서, 그리고 나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나는 종종 그리고 심각하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나의 세례를 사용해야 한다.  비록 나의 이마에 삼위 하나님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을지라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죄의 쾌락과 세상에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는가? 나의 세례에 표시되고 인쳐져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은 성령에 의해서 나에게 적용되어져 있는가?  나는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내 안엣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라는 것이 있어서 “주의 권능의 날에 즐거이 헌신”하고자 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시편 110:3)?

우리가 영적으로 우리의 죽은 상태에 대해서 찔림을 받고,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된 복음의 공급을 구할 때에 그러한 자기 점검의 유익을 얻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께서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고백하는 것을 중생과 양자됨을 통해서 현실로 만들어주실 것을 간구한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37).”  “나는 주의 것이오니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119:94).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예레미야 31:18).

맥클라우드 목사님은 그랜드 래피즈 북미 자유개혁교회의 목사이다.  글은 그가 최근에 출판한 “ 어떻게 하면 나의 세례로부터 유익을 얻을 있을까”라는 이름으로 32분량의 소책자에서 가져온 것이다.  개혁유산서적은 성경적 경건 배양 시리즈를 통해서 책을 출판했다.     


[1] Pierre C. Marcel, The Biblical Doctrine of Infant Baptism (New York: Westminster Publishing House, 2000), 108.

[2] James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 (London: Banner of Truth, 1960), 2:111. See John 3:3, 5, 8.

[3] Matthew Henry, The Miscellaneous Writings of the Reverend Matthew Henry: Consisting of the Life of His Father, Sermons, Tracts, and Biographical Sketches of Eminent Christians and Ministers (London: Samuel Bagster, 1811), 7:30.

[4] Robert L. Dabney, Syllabus and Notes of the Course of Systematic and Polemic Theology (Richmond, Va.: Presbyterian Committee of Publication, 1927), 799.

[5] Douglas Bannerman, The Scriptural Doctrine of the Church (Stoke-on-Trent, England: Tentmaker Publications, 2006), 354.

[6] As quoted in Douglas Bannerman, Scriptural Doctrine of the Church, 60.

[7] Marcel, Biblical Doctrine of Infant Baptism, 224.

[8]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Peabody, Mass.: Hendrickson, 2016), 3:589.